최근 출판계와 문학계 전반에 걸쳐 흥미로운 지각 변동이 감지되고 있다. 독자들이 열광하는 작품의 결이 과거의 무겁고 이성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특히 섬세한 시선으로 일상의 결을 포착해내는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악하며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중이 문학에 기대하는 바가 거대한 이데올로기나 철학적 깨달음에서 ‘가볍고 경쾌한 카타르시스’ 혹은 ‘소박한 일상의 위로’로 뚜렷하게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철학적 잣대를 거부한 사강의 파격

세계 문학사를 돌아보면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조르주 상드나 미국의 스토 부인, 20세기 전반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와 미국의 마거릿 미첼 등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여성 작가들은 꾸준히 존재했다. 특히 마거릿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리며 문단을 놀라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그 ‘신화’를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깨고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1954년, 불과 19세의 나이에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그녀는 단명할 것이라는 세간의 섣부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듬해 『어떤 미소』, 그리고 이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연달아 흥행시켰다. 세 작품 모두 성공적으로 영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남성 작가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며 작가로서의 굳건한 입지를 다졌다.

사강이 당시 프랑스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핵심 이유는 그녀의 작품이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당대는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변되는 실존주의 문학이 튼튼한 아성을 구축해, 소설은 응당 철학적 고뇌를 담아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시기였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방대한 대하소설이 득세하던 나라에서, 거창한 스케일이나 역사의식 없이 자잘한 일상의 권태와 세속적 연애 심리만을 그려낸 그녀의 소설은 경천동지할 이변이었다. 원고지 400장 안팎의 짧은 분량과 간결한 단문으로 쓰인 사강의 작품은, 무거운 도덕률과 이성 중심의 텍스트에 지쳐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이것이 바로 사강만의 대담한 독창성이자 한국의 작가들 역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다.

화려함 대신 선택한 조용한 삶의 가치

사강이 무거운 철학 대신 감성과 일상의 권태에 주목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현대의 문학은 화려하고 시끄러운 성공 서사 대신 지극히 평범한 삶이 건네는 잔잔한 위로를 탐구하고 있다. 바다 건너 미국의 현대 에세이에서도 이러한 정서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2023년 2월 탤러해시 여행 중 일행 세 명과 함께 우연히 방문하게 된 조지아주 토머스빌의 독립 서점 ‘더 북셸프(The Bookshelf)’가 그 생생한 무대다. 이곳의 대표인 애니 B. 존스는 남부 지역의 삶과 책, 서점 이야기를 진솔하게 다루는 인기 팟캐스트 ‘프런트 포치에서(From the Front Porch)’의 진행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봄 그녀가 출간한 에세이 『보통의 시간: 머무르며 배운 교훈들(Ordinary Time: Lessons Learned While Staying Put)』은 출간 직후 수많은 독자들의 서재 한 켠을 빠르게 차지했다.

이 책은 북적이는 대도시에서의 스펙터클한 모험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현대 사회의 암묵적인 강박에 단호한 물음표를 던진다. 그 대신 작은 마을에서의 ‘보통의 일상’이 어떻게 그 화려함을 훌륭하게 대체할 수 있는지 차분하게 논증해 나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

유년기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작가의 삶을 관통하는 에세이의 흐름은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깊은 내면의 성찰을 이끌어낸다. 사강의 짧은 소설이 독자들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았듯, 존스의 글 역시 무엇이 정답인지 설교하지 않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묵직한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우리는 대체 왜 고요한 삶보다 소란스러운 삶이 더 낫다고 믿어왔을까? 애초에 꿈꿨던 인생의 궤적이 아닐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이끌려온 이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은 자’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꺼이 놓아주고 또 무엇을 끝까지 꽉 쥐어야만 하는가.

결국 두 텍스트가 관통하는 진실은 하나다. 독자들이 책장을 넘기며 진정으로 마주하고 싶은 것은 숨 막히는 서사나 철학적 훈계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 속에 숨겨진 벅찬 감정과 조용한 삶에 대한 찬사다. 종이책이든 오디오북이든, 보통의 삶을 조명한 이 훌륭한 이야기들은 일상의 가치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사유의 시간을 열어준다.